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쟁 범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쟁 범죄

난징 대학살부터 팔라완 학살까지,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사건별로 정리한 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군은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서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난징 대학살처럼 널리 알려진 사건도 있고, 방카 섬이나 팔라완처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학살도 있습니다. 일부 만행은 너무 잔혹해서 이해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일본은 사무라이 시대부터 이어진 오랜 전쟁사로 유명하지만, 근대 이후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과 그 과정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는 일본 안에서도 오랫동안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사례를 인종적 증오로 바라보며 그들처럼 되지는 마십시오. 현재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국가 가운데 하나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일본 안팎에서 많은 사람이 잊으려 하거나 무시하려 해도, 역사의 끔찍한 범죄를 기억해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차 15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은 제2차 중일전쟁(1937~1945) 기간 동안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 주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대량 학살 및 강간 사건입니다. 중국 정부는 희생자를 30만 명으로 집계하고 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은 2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도시를 점령하는 동안 일부 병사들은 누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 겨루기도 했습니다. 많은 중국 여성이 납치되어 성노예로 사용되었으며, 점령 기간 동안 강간 피해자는 2만~8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여성은 강간된 직후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시신이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조차 이 만행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당했습니다.

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약 6주 동안 이어졌습니다. 난징 학살을 지휘한 마쓰이 이와네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다니 히사오는 난징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00인 참수 경쟁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도 1947년에 처형됐습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이 중국인을 총검으로 처형하는 모습

위안부

난징 대학살 외에도 제2차 중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이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로 삼았다고 믿어집니다. 이들은 위안부라고 불렸으며, 피해자는 2만~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상당수는 한국인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동아시아 전역의 위안소로 보내져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위안소는 장시간 운영됐고, 여성들은 거의 휴식도 없이 해를 거듭하며 매일 강제적인 관계를 강요당했습니다.

2015년 12월 한일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되돌릴 수 없게 해결한다고 발표했고, 일본은 10억 엔을 출연해 화해·치유재단을 세웠습니다. 당시 생존 피해자 46명 가운데 36명이 재단의 지원금을 받았지만, 피해자단체의 반발로 재단은 2019년에 해산했습니다.

점령기 일본군 병사와 두 젊은 여성의 사진

731부대

731부대(일본어: 七三一部隊)는 만주국 시기 하얼빈 핑팡에 있던 관동군의 방역급수부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물 공급 임무를 맡은 부대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생물 무기와 인체 실험을 연구하는 비밀 기관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한국인, 심지어 연합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인체 실험이 이뤄졌습니다. 일반 범죄자와 적군 포로, 반일 활동가들도 실험 대상이 됐습니다.

731부대의 실험 중에는 포로들에게 성병을 감염시켜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일부는 마취 없이 생체 해부를 당해 질병이 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했습니다. 여성 수용자는 간수에게 강간당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포로들은 동상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냉동 실험을 받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페스트균 같은 세균 무기와 폭탄 실험의 대상이 됐습니다. 물과 음식 없이 방치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전후 731부대 관계자 상당수는 실험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대가로 처벌을 면했습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돼 1949년 하바로프스크 재판에 회부됐고, 731부대가 남긴 어두운 기록은 전쟁 범죄 처벌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방독면을 쓴 731부대원과 핑팡의 부대 시설

버마 철도

동남아시아 점령 기간 동안 일본은 태국과 버마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했습니다. 이 철도는 울창한 정글을 가로질렀고 대부분 손으로 건설됐습니다.

일본은 6만 명의 전쟁 포로와 20만 명의 현지 노동자들을 모아 몬순과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밤낮으로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쌀만 주어졌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죽게 방치됐습니다. 뎅기열과 콜레라, 열대성 궤양, 마비를 일으키는 비타민 B 결핍이 돌았고, 질병과 영양실조, 과로로 숨진 사람은 약 11만 6천 명에 달했습니다.

바탄 죽음의 행진

필리핀 바탄의 만행은 1942년 해당 지역이 일본군에 항복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일본군은 너무 많은 전쟁 포로를 감당할 수 없어 7만 명이 넘는 포로들에게 정글을 행진하게 했습니다.

이 행진은 바탄 죽음의 행진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군은 항복을 약점의 신호로 보고 포로들을 끊임없이 구타했습니다. 물 부족과 정글의 더위, 탈진으로 뒤처진 사람들은 그대로 버려졌습니다.

낙오자들은 참수되거나 그대로 죽게 방치됐습니다. 행진 중 7,000~10,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7만 명 가운데 54,000명만이 오도널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수용소에서도 질병과 굶주림으로 약 2만 명의 필리핀인과 1,500명의 미국인이 추가로 숨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군기를 앞세우고 진격하는 일본군

방카 섬 학살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장악한 후 연합군이 철수하던 1942년 2월, 일본군 항공기는 최대한 많은 탈출 선박을 침몰시키려고 바다를 폭격했습니다.

그중 한 배에는 65명의 호주 간호사가 타고 있었고, 배가 침몰한 뒤 그중 53명이 일본군이 통제하는 작은 방카 섬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일본군은 부상당한 군인과 연합군 병사, 간호사들을 해변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해변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간호사들에게 얕은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뒤 난사했습니다. 간호사 22명 가운데 21명이 숨지고 비비안 불윙클만 살아남았으며, 함께 끌려온 민간인 여성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부상병들도 총검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불윙클과 선원 두 명뿐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불타는 도시와 일본군 장교들

산다칸 죽음의 행진

호주 역사상 최악의 군사 만행으로 여겨지는 산다칸 죽음의 행진은 호주 외부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이 후퇴할 때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보르네오의 산다칸 포로 수용소를 버리고 수용된 병사들을 정글을 통해 라나우까지 행진하게 강요했고, 병사들은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행군 도중에도 낙오자가 사살됐고, 산다칸으로 보내진 연합군 포로 2,750명 가운데 전쟁이 끝날 때 살아남은 사람은 6명뿐이었습니다.

식량 부족은 일본군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일부는 자살하거나 식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은 호주뿐만 아니라 전쟁 중 여러 장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군은 하와이의 미군 기지인 진주만을 기습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군인 2,335명과 민간인 68명이 숨지고 많은 사람이 다쳤으며, 여러 전함과 항공기가 파괴되거나 손상됐습니다.

사망자 가운데는 17~18세의 젊은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공격이 발생한 배경에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와 고철 수출을 금지한 조치가 있었습니다. 석유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은 이 봉쇄를 치명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를 핵무기로 파괴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 본토 공격 시도: 진주만 외에도 일본은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1942년에는 잠수함이 캘리포니아 엘우드를 포격했고, 오리건주 상공에 소형 수상기를 띄워 소이탄을 투하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공습 경보가 울려 도시가 어둠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격으로 인한 희생은 적었지만 미국 국민 사이에 공황을 일으켰습니다.

진주만 공격으로 불타는 미국 전함

잠수함 I-8 학살

일본 잠수함 I-8 승무원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건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먼저 네덜란드 화물선을 침몰시키고 승무원을 잡아 올렸습니다.

그들은 많은 승무원을 검과 렌치, 쇠망치로 구타하고 총으로 쏜 뒤 바다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에 불과했습니다.

I-8 승무원은 미국 화물선 진 니콜레호를 침몰시키고 승조원들을 잡아 구타한 뒤 바다에 던졌습니다. 잠수함이 급강하하면서 갑판에 묶여 있던 생존자들이 바다로 빨려 들어갔고, 이 두 번째 공격에서 구조된 미국인은 약 23명이었습니다.

마닐라 전투

194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일본군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철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명령을 무시한 해군 방위대 사령관 이와부치 산지는 도시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본군은 필리핀인들을 강간하고 총살했으며, 신체를 훼손하고 참수했습니다. 약 한 달간 이어진 전투로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이 숨졌고, 일본군도 약 1만 2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오늘날 국가적 비극으로 기억되는 마닐라 전투는 수천 명의 생명 외에도 수많은 역사적 보물과 학교, 교회, 수녀원, 대학교, 수도원 등 회복할 수 없는 문화유산을 필리핀에 잃게 했습니다.

1945년 마닐라 전투 이후 폐허가 된 마닐라

숙칭 작전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장악한 일본군은 일본 통치에 반대할 수 있는 중국계 주민과 좌파, 공산주의자, 무기 소지자를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숙칭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어로는 싱가포르 대검증(大検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작전으로 중국계 남성에 대한 기관총 학살 등 여러 학살이 발생했고, 학살은 말레이반도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희생자가 6,000명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종군기자 히사카리 다카후미는 중국계 주민 5만 명을 학살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리콴유는 말레이반도까지 포함해 7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나우루 점령

일본군은 1942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파푸아뉴기니 동쪽 적도 부근의 작은 섬 나우루를 점령했습니다. 그 기간에 호주인 관리 5명을 처형하는 등 일련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나우루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시설이 있었습니다. 1943년 7월, 일본군은 환자 39명을 배에 태워 바다로 끌고 나간 뒤 함포와 기관총으로 쏘아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그들은 또한 약 1,200명의 나우루 원주민을 트럭 제도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강제 이주된 이들 중 다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전후 나우루로 돌아온 사람은 80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 행진하는 일본군과 간호사들

팔라완 학살

필리핀 팔라완의 포로 수용소는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굶어 죽지 않으려고 파파야를 먹었다는 이유로 두 명의 미국 병사가 파이프로 구타당해 왼쪽 팔이 부러졌습니다.

1944년 12월 14일, 일본군은 공습 경보를 울려 수용소에 있던 미국인 150명을 폭격 대피용 참호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출입구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습니다.

일부는 근처 만으로 헤엄쳐 탈출하려다 총에 맞았고, 다른 이들은 바위 사이에 숨으려다 발견되어 살해당했습니다. 이 학살에서 139명이 숨지고 11명만이 필리핀 게릴라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일본의 다른 공격 및 전쟁 범죄

홍콩 침공 - 1941년 12월 일본군은 홍콩을 침공했습니다. 성 스테판 대학 야전 병원에는 부상병과 의료진이 남아 있었지만, 일본군은 이들을 총검으로 학살했고 간호사들은 강간당한 뒤 살해당했습니다.

포트 블레어 학살 - 안데만 제도의 포트블레어에서는 1944년 1월 스파이 혐의를 받은 인도 민간인 44명이 총살당했습니다.

돼지 바구니 학살 - 동부 자바에서는 항복 후 산으로 피신했던 포로들이 체포돼 돼지 수송용 대나무 바구니에 갇힌 채 뜨거운 트럭으로 옮겨진 뒤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른바 돼지 바구니 만행은 이마무라 히토시가 지휘 책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알렉산드라 병원 학살 - 1942년 2월 싱가포르의 알렉산드라 병원에서는 수술 중이던 군인을 포함해 최대 50명이 총검과 총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이튿날에는 남성 200여 명이 400m를 걸어 산업 지대로 끌려가 물도 주지 않은 채 밀폐된 방에 갇혔고, 다음 날 아침 대부분 총검으로 숨졌습니다.

라하 비행장 학살 - 암본 섬 라하 비행장에서는 항복한 호주군과 네덜란드군 포로 300명 이상이 참수되거나 총검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전후 이 학살을 다룬 재판에서 일본군 장교들이 처벌받았습니다.

적군 파일럿 학살 - 일본 정부가 항복 의사를 밝힌 1945년 8월 15일 직후에도 후쿠오카에서 미군 조종사 15명이 참수당했습니다.

중국 도시 공격 - 난징 외에도 우한과 상하이 등 주요 도시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충칭은 1938년부터 1944년까지 268차례 폭격을 당했고, 1939년 5월 폭격으로만 3,000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소수 민족 공격 - 일본은 아이누와 한국인 등 소수 민족을 강제로 동화하고 노동력으로 동원한 책임도 제기됩니다. 아이누는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식 이름과 언어를 강요당했고, 한국인 다수는 전시 동원령으로 강제 노역에 끌려갔습니다.

일본의 이러한 범죄에 대한 처벌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전쟁 중 저지른 범죄에 대해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재판소는 일본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을 전쟁 범죄 및 반인도 범죄로 기소하기 위해 연합국이 설립했고, 재판은 1946년 5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이어졌습니다.

재판 결과, 많은 일본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이 사형 또는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8명이 기소돼 2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7명이 1948년 12월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필리핀에서 벌어진 학살의 책임을 물은 야마시타 토모유키도 1946년 2월 마닐라에서 처형됐습니다.

IMTFE 재판 외에도 일본은 중국과 태평양 섬 국가 등 다른 국가들에 전쟁 중 입힌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일본은 또한 무장 해제와 영토 정복의 포기를 강요받았습니다. 평화헌법 9조에 따라 전쟁과 교전권을 포기하면서 오늘날 일본은 정규군 대신 자위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출처 및 유용한 링크

저자 소개

Kevin Henrique

일본, 한국,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중심으로 아시아 문화에서 10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전문가입니다. 일본어 교육, 여행 팁, 깊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집중하는 독학 작가이자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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