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유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유

연합국 편에 선 일본, 칭다오에서 21개조까지

일본은 종종 제2차 세계 대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전에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그때의 편은, 나중에 싸운 쪽과 정반대였다.

1902년의 영일 동맹이 명분이 되었고, 중국과 태평양에 남아 있던 독일 거점을 노릴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그 동맹은 유럽 전선까지 일본을 자동으로 끌어들이는 장치가 아니었다. 참전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꽤 계산적이었다.

목차 5

일본은 왜 연합국 편에 섰나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강국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유럽과도 여러 협약을 맺었고, 그중 핵심이 영국과의 영일 동맹이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 동맹 편이었던 것은 아니다. 1914년 일본이 선 자리는 영국·프랑스·러시아와 함께한 연합국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한때 영일 동맹이 이번 유럽 전쟁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일본도 중립을 선언했다. 며칠 뒤 런던은 중국 근해의 독일 순양함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가, 일본이 중국과 남태평양에서 너무 많이 가져갈까 봐 태도를 바꿨다. 참전 범위 한정을 놓고 오락가락한 쪽은 오히려 영국이었다.

일본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원로와 육군 쪽은 독일과 맞서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는 동맹을 명분 삼아 국익을 취하자고 밀어붙였다. 만주의 조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산둥의 독일 이권을 손에 넣으면 다음 협상 판이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은 1914년 8월 15일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답신이 없자 23일 선전포고를 했다. 다이쇼 시대의 이 결정은 유럽 참호전에 병력을 던져 넣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 독일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쪽에 가까웠다.

일본은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의 아시아 거점을 빼앗고, 한 세대 뒤에는 그 독일과 손을 잡았다. 그 사이에는 20년이 넘는 외교, 이권 다툼, 침략이 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리에서 피난하는 사람들과, 제복을 입은 일본군 장교들의 단체 사진

칭다오 함락과 남양 군도

당시 독일은 중국 산둥반도 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 조차지와 해군 거점으로 쓰고 있었다. 일본군은 영국군과 함께 이곳을 포위했고, 1914년 11월 7일 독일 수비대가 항복했다. 일본의 제1차 세계 대전 본전은 서부 전선이 아니라 이 중국 연안 요새였다.

같은 해 가을, 일본 해군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 군도—마리아나, 캐롤라인, 마셜 제도—도 점령했다. 군사 활동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조차지에 집중됐다. 유럽에 육군을 보내 달라는 요청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들어왔지만, 일본은 국익과 직접 닿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늘고 있던 제국에게, 먼 유럽 참호보다 가까운 아시아의 항구와 섬이 더 급했다.

중국을 향한 21개조 요구

칭다오를 손에 넣은 뒤, 일본은 전장을 외교로 옮겼다. 1915년 1월 18일 오쿠마 내각은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에게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산둥에서 독일이 갖고 있던 이권을 일본이 이어받고, 남만주의 조차·철도 기한을 늘리며, 중국 내정에 일본인 고문을 들이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밀어붙인 쪽은 다이쇼 시대의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였다.

중국 쪽 반발이 거셌고, 구미 열강도 일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5월 7일 최후통첩을 보냈고, 위안스카이는 9일 대부분을 받아들였다. 이 굴욕은 나중에 1919년 5·4 운동의 불씨가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누가 중국의 이권을 이어받을지를 둘러싼 전쟁이기도 했다.

일장기를 든 일본 보병이 야전을 가로지르는 장면과, 욱일기 아래 폭발이 이는 전장 사진

1917년, 지중해로 간 함대

아시아의 전투가 일찍 끝난 뒤에도 연합국은 일본에 더 많은 협력을 요청했다. 육군 파병은 거절됐지만, 해군은 움직였다. 1917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심해지자, 일본은 제2특무함대를 지중해에 보냈다. 순양함 아카시를 중심으로 구축함들이 몰타를 기지 삼아,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세유로 향하는 병력 수송을 호위했다.

유보트에 맞은 선박에서 7천 명 이상을 구출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지중해에서 전사한 일본 수병은 78명. 몰타의 옛 영국 해군 기지에는 그 묘비가 있다. 칭다오가 함락된 지 3년이 지난 뒤에야 일본 함대가 유럽 바다에 나타난 셈이다.

승전 뒤에 남은 긴장

일본은 전승국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앉았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산둥의 독일 이권과 적도 이북 남양 군도의 위임통치를 얻었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됐다. 본토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 군수 수출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다만 그 대가는 중국의 분노와, 태평양에서 미국과의 신경전이었다.

1914년의 동맹은 영원하지 않았다. 그 긴장은 한순간에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점프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만주, 1937년의 제2차 중일 전쟁, 그리고 난징 대학살이 있다. 편을 바꿔 독일과 손잡은 것은 그다음 이야기다. 결국 그 길은 진주만 기습과 히로시마의 핵 재앙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그 긴 경사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연합국 편에 선 이유와, 나중에 추축국이 된 이유는 같은 문장으로 묶이면 안 된다.

출처 및 유용한 링크

저자 소개

Kevin Henrique

일본, 한국,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중심으로 아시아 문화에서 10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전문가입니다. 일본어 교육, 여행 팁, 깊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집중하는 독학 작가이자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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