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는 백 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왔습니다. 1899년 도쿄 가부키좌에서 공개된 게이샤의 손춤(芸者の手踊り)은 고니시 상점의 아사노 시로가 촬영한 짧은 실사 기록입니다. 극영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마키노 쇼조와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만든 주신구라(忠臣蔵) 연작이 47인의 로닌 전설을 스크린의 중심 소재로 올렸습니다.
한동안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영화 산업이 군부의 통제 아래 놓였습니다. 극장에서는 교육 영화와 군사 선전물이 대량으로 상영되었고, 천황에 대한 충성과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다룬 작품이 늘어났습니다. 태평양 전쟁기 영화는 이념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영화
패전 뒤 일본은 도시와 마음 모두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영화는 재교육의 도구로도 쓰였지만, 경제가 살아나면서 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같은 대형 스튜디오가 다시 일어설 공간이 열렸습니다. 서구 영화의 영향은 더 뚜렷해졌고, 그 흔적은 화면에도 남았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3년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로 데뷔했습니다. 유도 도장의 청년을 그린 이 작품 이후 그는 선과 악이 쉽게 갈리지 않는 인물을 거듭 끌어냈습니다. 1950년작 라쇼몽(羅生門)은 이듬해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1952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으며 일본 영화가 해외 평단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2년 뒤 배우 출신 감독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다이에이 최초의 컬러 장편 지옥문(地獄門)을 찍었습니다.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1954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고, 1955년 아카데미에서 명예상과 의상 디자인상을 받았습니다. 국내 첫 컬러 극영화는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1951)였고, 지옥문은 그 색채를 외국 관객에게 알린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 뒤 제작 규모는 빠르게 커졌습니다. 국립영화아카이브에 따르면 1958년 연간 관객은 약 11억 2천만 명에 달했고, 1960년에는 극영화만 547편이 만들어졌습니다. 텔레비전 이전의 일본에서 영화는 가장 큰 대중 오락이었습니다.
일본 영화의 다양화
소재는 드라마에서 코미디까지 넓어졌습니다. 여성 배우가 화면의 중심으로 올라오면서 스타, 당시 말로 영화 디바가 등장했고, 뮤지컬과 액션, 영웅물도 다시 자리를 잡았습니다. 1954년 고질라가 히트하면서 특수촬영을 앞세운 공상 과학과 괴수 영화가 자리를 잡았고, 같은 계통에서는 가메라가 라이벌로 떠올랐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시노다 마사히로, 스즈키 세이준이 스튜디오의 관습을 깨고 범죄, 성, 소수자의 자리, 안티히어로를 도발적인 형식과 초현실적 연출로 다루었습니다.
1988년 오토모 가쓰히로는 장편 아키라로 애니메이션의 문법을 바꿨습니다. 핵전쟁 이후의 네오 도쿄를 배경으로 기술, 청소년 폭력, 정치 음모가 한 화면에 겹칩니다. 그보다 앞선 1984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극장용 장편으로 옮겼고, 이 작품은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2001년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공개했습니다. 일본 흥행 기록을 오랫동안 지킨 이 작품은 2002년 베네치아에서 황금사자상을, 2003년 아카데미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습니다. 2016년에는 너의 이름은이 다시 국내외 흥행 기록을 갈아 치우며, 실사 고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진 경로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일본 영화는 국내 극장, 영화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짧은 실사에서 시작해 라쇼몽과 지옥문을 거쳐 아키라와 지브리에 이른 이 줄기는, 한 나라의 영화가 자기 전통과 바깥 관객을 동시에 상대해 온 방식을 보여 줍니다.
마르셀로 두 카르모가 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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