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천황은 남고 쇼군이 다스린 일본의 봉건 시대

막부: 천황은 남고 쇼군이 다스린 일본의 봉건 시대

장군의 막사가 700년 정부가 된 사정

막부(幕府, 바쿠후)라는 한자는 원래 전장의 장군 막사를 가리켰다. 그 막사가 일본에서는 거의 700년 동안 나라의 실질 정부가 되었다. 천황은 법적으로(de jure) 군주로 남고, 쇼군(정이대장군)이 사실상(de facto) 실권을 쥐는 이중 구조 — 이게 봉건 일본을 읽는 첫 열쇠다.

그 체제는 한 가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독점한 독재도 아니었다. 가마쿠라, 무로마치(아시카가), 에도(도쿠가와) 세 막부가 일어났고, 그 사이에는 겐무 신정과 아즈치·모모야마처럼 막부가 비어 있던 틈도 있었다. 전쟁만 남은 암흑기가 아니라, 그 긴 세월이 남긴 제도·도시·문화의 결이 따로 있다.

목차 5

막부는 무엇인가

막부는 쇼군이 이끈 무가 정권의 정청이다. 쇼군은 그 정청의 수장이고, 막부는 그 수장을 둘러싼 기구와 통치 체제를 가리킨다. 서양에서는 흔히 쇼군국(shogunate)이라 부르지만, 한국어·일본어에서는 사람(쇼군)과 기구(막부)를 나눠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중요한 뉘앙스가 하나 있다. “쇼군이 곧 절대군주”는 도식일 뿐이다. 가마쿠라 후기에는 호조 씨의 싯켄(執権)이 실무를 장악했고, 에도에서도 로주(老中) 같은 막각이 일상의 국정을 돌렸다. 천황의 권위는 형식에 가깝되 완전히 빈 껍데기는 아니었다. 정이대장군 임명 자체가 조정의 선하(宣下)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막부 연대 본거지 주도 가문
가마쿠라 막부 1185년경~1333년 (쇼군 선하는 1192년) 가마쿠라 미나모토, 이후 호조(싯켄)
무로마치 막부 1336년~1573년 교토 무로마치 아시카가
에도 막부 1603년~1868년 에도(지금의 도쿄) 도쿠가와
갑옷을 갖춘 일본 사무라이들이 늘어선 모습

가마쿠라 막부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1147~1199)가 간토의 가마쿠라를 거점으로 무가 정권을 세우면서 열린다. 헤이케를 무너뜨린 뒤 실질 권력은 1180년대에 이미 쌓였고, 1192년에 정이대장군 선하를 받으면서 명실상부한 쇼군이 되었다. 그는 “쇼군 섭정”이 아니라 초대 쇼군이었다. 섭정에 해당하는 싯켄은 그 뒤에 호조 씨가 차지한 자리다.

가마쿠라 막부는 처음부터 교토 조정을 갈아엎은 전국 정권이 아니었다. 동국을 중심으로 고케닌을 묶고, 슈고·지토를 통해 무사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청으로 커 갔다. 1221년 조큐의 난 이후 영향력은 서쪽으로도 넓어졌고, 13세기 후반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막부가 열도 방위의 중심임을 확인시키는 시험이 되었다.

요리토모 사후 미나모토 쇼군 가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실권은 호조 싯켄에게 넘어갔고, 쇼군 자리는 후지와라 씨, 나중에는 황족 출신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고다이고 천황(1288~1339)은 여러 차례 막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초기의 거사는 실패했지만, 1333년 닛타 요시사다와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의 거병으로 가마쿠라는 함락되고 호조 정권은 끝났다. 그 직후 고다이고가 연 것이 겐무 신정이다. 쿠데타가 “실패해서” 막부가 무너진 게 아니라, 막부가 무너진 뒤 짧은 천황 친정이 시도된 것이다.

칼자루와 칼집이 보이는 사무라이의 일본도

무로마치 막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1305~1358)는 처음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편에 섰다. 그러나 겐무 신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무사층을 끌어안고 배반한 뒤, 교토에 새 천황을 옹립하고 자신이 쇼군이 되어 두 번째 막부를 열었다. 본거지가 교토의 무로마치였기에 한국어에서는 무로마치 막부라 부르는 경우가 많고, 가문을 앞에 두면 아시카가 막부가 된다.

다카우지가 북조를 세우고 고다이고가 요시노로 내려가 남조를 열면서 남북조가 갈라졌다. 통일은 1392년에야 이루어진다. 이 시기 일본은 명과의 감합 무역 등 동아시아 교역망에 발을 들여놓았고, 조선과도 사절과 교역이 오갔다.

1467년부터 1477년까지 이어진 오닌의 난은 쇼군 후계와 유력 슈고의 대립이 교토를 폐허로 만든 내전이었다. 이후 다이묘들이 제각기 일어서고 쇼군에 대한 충성심이 옅어지면서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가 열린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1534~1582)가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1537~1597)를 추방하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사실상 끝났다. 그렇다고 곧 다음 막부가 들어선 것은 아니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즈치·모모야마는 막부 공백기의 통일 전쟁이었다.

에도 막부

노부나가는 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1528~1582)에게 쓰러졌다. 미쓰히데는 쇼군이 된 적이 없다. 야마자키에서 원수를 갚은 사람은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였고, 그 역시 쇼군이 아니라 관백으로서 열도를 묶었다.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정유재란은 조선을 전장으로 만든 침공이었고, 실패는 그의 권위를 크게 흔들었다. 1598년 그가 죽자 도요토미 정권은 공백에 빠졌지만, 그건 “막부가 붕괴한” 사건이 아니라 막부가 아직 다시 서지 못한 상태에서 후계 전쟁이 열린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서군을 무너뜨리고, 1603년 쇼군에 올라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 1603~1868)를 열었다. 막번체제 아래 다이묘를 번으로 묶어 두고, 참근교대로 지방 영주의 주머니와 시선을 에도에 붙들어 매는 방식이 이 막부의 뼈대였다.

대외적으로는 쇄국(鎖国, 사코쿠)이 유명하다. 다만 “나라를 완전히 잠갔다”는 말은 과장이다.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 쓰시마를 통한 조선 교역, 류큐와 에조치 방면의 창구는 남았다. 1607년부터 이어진 조선통신사는 그 제한된 창구 위에서 두 세기 가까이 오갔다. 안쪽에서는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고정되었고, 우키요에와 도시 문화가 피어난 것도 바로 이 긴 평화 안에서였다.

도쿠가와 시대 풍의 갑옷과 무기를 갖춘 사무라이

그 안정도 19세기 중반에는 버틸 수 없었다. 1853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개항을 요구했고, 막부 안팎의 균열이 막말을 만들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정권을 조정에 돌려보내는 대정봉환을 단행했다. 그래도 무력 충돌은 남아서, 1868년 보신 전쟁메이지 유신이 쇼군 체제의 끝을 확정했다.

막부의 종말, 그리고 남은 것

1868년을 기점으로 670년이 넘는 쇼군 통치가 막을 내렸다. 사무라이 계층은 특권을 잃었고, 1876년 폐도령으로 칼 휴대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들이 “박해되어 소멸”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신정부의 관료·군인으로 흡수되었고, 일부는 반란에 나섰으며, 대부분은 녹봉이 끊긴 뒤 다른 생업으로 흩어졌다. 일본은 몇십 년 안에 동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올라섰지만, 그 속도의 대가는 따로 있었다. 메이지 천황 아래의 근대 국가는 막부가 남긴 중앙 집권의 습관 위에서 세워졌다.

메이지 초 신푸렌의 난을 그린 무장 장면

막부 시대를 전쟁과 암울함만으로 읽는 것은 반쪽이다. 그 7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본은 사무라이의 명예 규범과 선(禪) 불교, 금각사 같은 아시카가의 문화, 다이묘의 성곽, 호쿠사이의 우키요에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남는 형식을 만들어 냈다. 가마쿠라의 출발이 궁금하다면 가마쿠라 시대를, 세 막부를 한 줄로 이어서 보고 싶다면 일본 막부 개관을 이어서 읽으면 된다.

출처 및 유용한 링크

저자 소개

Kevin Henrique

일본, 한국,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중심으로 아시아 문화에서 10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전문가입니다. 일본어 교육, 여행 팁, 깊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집중하는 독학 작가이자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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