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부대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일본 근현대사나 중일 전쟁을 조금 따라가 본 사람이라면, 방역과 급수라는 간판 뒤에 생체실험이 있던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마주쳤을 겁니다.
731부대(731部隊, 나나산이치 부타이)는 옛 만주국 하얼빈 외곽 핑팡(平房)에 있던 관동군 산하 부대입니다. 공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関東軍防疫給水部)였고, 이시이 부대라고도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 명칭은 보건 서비스를 베푼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전염병을 막고 물을 정화한다는 말은 세균전과 인체실험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습니다. 책임자는 관동군 장군이자 군의관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郎)였습니다. 그가 야전용 정수기를 만든 것도 그 간판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려는 일이었습니다. 실험은 전부 지하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실험실·수용 시설·보일러실이 모인 넓은 단지에서 진행됐습니다.
대상은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조선인, 그리고 일부 연합군 민간인과 포로였습니다. 일반 범죄자, 붙잡힌 적군, 반일 무장 세력도 실험에 동원됐습니다.

목차 3
731부대 내부
실험 대상은 일본어로 통나무를 뜻하는 마루타(丸太)로 불렸습니다. 지역에는 제재소라는 설명이 돌았고, 그 농담이 그대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관동군 헌병대가 재판 없이 보낸 특별이송이 그 공급원이었습니다. 핑팡 일대는 특별군사구역으로 묶여, 지나가는 열차는 커튼을 내리라는 말을 들었고 창밖을 들여다본 승객은 심문을 받았습니다.
731부대에서 자행된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전염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포로에게 성병을 감염시키는 실험;
- 질환이 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마취 없이 포로를 생체 해부하는 실험;
- 부대 경비원에 의한 강간;
- 극심한 추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포로를 혹한에 노출시키는 실험;
- 수류탄, 화염방사기, 생물학 무기 등을 포로를 대상으로 시험하는 실험;
- 포로가 사망할 때까지의 시간을 재기 위해 물과 음식을 빼앗는 실험.
시설 안에서 숨진 사람은 여러 조사에서 적어도 3천 명 안팎으로 잡힙니다. 중국 도시와 마을에 뿌린 세균전의 피해자 수는 그보다 크게 잡히지만, 집계마다 숫자가 갈립니다. 2002년 도쿄지방법원은 731부대가 1940~1942년 페스트균을 옮긴 벼룩을 살포하고 콜레라균을 우물과 음식물에 넣는 방식으로 세균전을 했다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난징의 1644부대, 베이징의 1855부대처럼 같은 계통의 방역급수 부대가 중국 여러 도시에 있었습니다.
이름이 확인된 조선인 희생자
하얼빈에서 공개된 명단에는 항일운동이나 첩보 활동으로 붙잡혀 온 조선인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 등이 그 예입니다. 확인된 이름이 적다고 해서 조선인이 예외였던 것은 아닙니다. 만주에서 붙잡힌 독립운동가와 민간인도 특별이송의 대상이 됐습니다.
전후의 731부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731부대는 해체됐습니다. 핑팡 시설은 폭파되었고, 남아 있던 수용자는 처분됐습니다. 그러나 실험을 지휘한 책임자들은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로 제대로 서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실험 자료를 받는 대가로 이시이 시로 등에게 면책을 주었습니다. 소련은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일부 대원을 기소했습니다.
그 결과 731부대의 존재는 한동안 대중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1989년 신주쿠 공사 현장에서 인골이 나와서야 처음 알려졌다고 말하면 과장이 됩니다. 하바롭스크 기록과 1980년대 증언·보도가 이미 있었습니다. 다만 1989년 옛 육군 군의학교 터에서 손상된 유골이 나오면서, 일본 안에서도 관심이 다시 커진 것은 맞습니다.
일본 정부는 731부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쪽으로 옮겨 왔습니다. 인체실험의 전모를 국가가 끝까지 확인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법정 인정과 연구·증언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얼빈 핑팡의 옛 터에 죄증진열관이 열려 있어, 남은 건물과 기록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 관련 영상을 남겨 둡니다.
731부대는 일본 제국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의 한 축입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와의 관계는 사과 한 줄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남는 거리감의 한 조각도 여기에 있고, 독가스 제조와 얽힌 오쿠노시마나 일본의 다른 어두운 면을 함께 보면 이 부대가 고립된 일탈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전쟁이 달력 위에서만 끝나지 않았다는 점은, 1974년까지 전쟁터를 떠나지 못한 일본군 잔류병 이야기에도 남아 있습니다.
커뮤니티
댓글
0개 댓글
이 언어로 공개된 댓글이 아직 없습니다.
댓글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