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노 마사부미: 타이타닉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일본인과 그 오명

호소노 마사부미: 타이타닉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일본인과 그 오명

살아남은 것이 죄가 되던 시대, 한 철도 관료의 기록

1912년 대서양에서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았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배에 탔던 유일한 일본인 승객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생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생존이 고향에서 어떻게 읽혔느냐였습니다.

철도 관료 호소노 마사부미(細野 正文)는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에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귀국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영이 아니라, ‘왜 살았느냐’는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이 어디서 왔고, 무엇이 사실이며 무엇이 후대에 부풀려졌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목차 9

호소노 마사부미는 누구였나

호소노 마사부미는 1870년 니가타현(현재 조에쓰시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쿄 고등상업학교(현 히토쓰바시 대학)를 졸업한 뒤 미쓰비시를 거쳐 관료 경로로 들어섰고, 철도 행정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러시아어를 익힌 그는 철도 연구를 위해 러시아로 파견되었고, 귀국 여정 중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에서 2등석으로 RMS 타이타닉에 탑승했습니다.

4월 14일 밤 빙산 충돌 뒤, 그는 처음에는 3등석 승객으로 오인되어 보트 갑판으로 가는 길이 막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갑판에 오른 그는 비상 신호 플레어와 혼란 속에서 죽음을 각오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을 틈을 끝까지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내려가던 구명보트 쪽에서 “아직 두세 명은 더 탈 수 있다”는 선원들의 말이 들렸고,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먼저 뛰어 내렸습니다. 호소노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후 조사와 생존자 목록에서는 그가 10번 구명보트에 탄 것으로 정리됩니다. (한때 13번 보트와 혼동된 설이 돌았지만, 그의 수기와 보트 기록을 대조한 쪽에서는 10번이 유력합니다.)

1912년 무렵의 호소노 마사부미 초상

생존의 무게

일본에서의 시선

처음 미국 쪽 보도에서는 ‘운이 좋은 일본인’처럼 다뤄진 적도 있습니다. 도쿄로 돌아온 뒤에는 요미우리 등 매체 인터뷰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를 우선한다’는 서양의 구조 서사, 그리고 일본 사회 안의 용기·희생·체면의 압력 속에서, 남성 생존자는 쉽게 ‘비겁’으로 읽히기 쉬웠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사무라이 시대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부시도로 요약되는 명예·자기 절제 이야기도 여전히 강력한 문화 언어였습니다. 셋푸쿠(할복) 같은 극단적 명예 의식까지 떠올리며 호소노를 재단한 목소리도 후대에 전해집니다. 다만 ‘교과서에 겁쟁이 사례로 실렸다’는 식의 서술은 1990년대 이후 기사에서 크게 퍼진 반면, 후속 조사에서는 그런 교과서를 찾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수치와 오명은 가족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았고, 동시에 ‘국민 전체가 즉시 그를 매장했다’는 그림은 과장됐을 수 있습니다.

일자리와 일상

귀국 후 그는 철도원 관직에서 한동안 불리한 처분을 받았습니다. 1913년 무렵 부참사 직에서 면직되고 촉탁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어서, 철도 행정 쪽 일은 이후에도 이어졌고 1925년 무렵 퇴관한 뒤에는 이와쿠라 철도학교 등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족에게는 오래도록 입에 올리기 힘든 주제였고, 본인도 타이타닉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1939년 3월 14일 도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타이타닉호와 일본인 생존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선박 이미지

왜 그토록 가혹하게 읽혔을까

역사적 맥락

20세기 초 일본은 근대화와 민족주의가 동시에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국가의 체면’과 ‘남자다움’이 겹치면, 개인이 위기에서 살겠다고 한 선택이 곧바로 공동체 수치로 번역되기 쉽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성과 어린이 우선’이 순수 사무라이 규범이라기보다 서양에서 들어온 도덕 서사와 섞여 일본에 정착했다는 해석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호소노는 보편적 생존 본능을 따랐을 뿐인데, 평가의 잣대는 그 본능이 아니라 시대의 체면이었습니다.

미국 쪽에서는 아치볼드 그레이시 등이 그를 구명보트 10번의 ‘밀항자’처럼 묘사하거나, 일부 증언이 남장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흐른 적도 있습니다. 그런 비난의 결은 일본 국내 서사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아시아인 남성 생존자’를 의심의 눈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겹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관점의 문제

타이타닉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호소노의 수기는 영웅담도 자백도 아닌, 두려움과 죄책감과 살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를 둘러싼 비판은 한 사람의 ‘도덕 점수’보다, 그 사회가 생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더 많이 보여 줍니다.

타이타닉 생존 이야기를 상징하는 이미지

호소노 마사부미의 유산

오늘날 그의 이야기는 ‘용감한 죽음 vs 비겁한 생존’이라는 이분법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난파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시선에 희생된 인물로 읽히기도 합니다.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처벌의 재료가 될 때, 공동체가 무엇을 숭배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손기와 재평가

비판과 침묵 속에서도 호소노는 타이타닉 편지지 위에 일본어로 경험을 남겼습니다. 그 문서는 타이타닉 문구류에 남은 희귀한 1인칭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7년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타이타닉》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던 무렵, 가족이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이야기가 다시 조명받았습니다. 손자인 음악가 호소노 하루오미(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는 가문의 명예가 회복된 듯 안도했다고 전합니다. 정부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는 식의 확인된 기록은 없고, 재평가는 자료 공개와 언론·연구 쪽 재검토에 가깝습니다.

만약 당신이 호소노의 자리였다면, 같은 결정을 했을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남았을까요. 극한 상황에는 쉬운 모범 답안이 없고, 남는 것은 사람의 선택과 그 선택을 나중에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입니다.

출처 및 유용한 링크

저자 소개

Kevin Henrique

일본, 한국,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중심으로 아시아 문화에서 10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전문가입니다. 일본어 교육, 여행 팁, 깊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집중하는 독학 작가이자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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