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시대, 혹은 가마쿠라 막부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이 기사에서는 일본에서 이 시대가 어떤 존재였는지, 누가 세웠는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 시대를 수놓은 갈등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오늘날에도 회자되는지를 정리합니다.
일본어로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라 부르며, 요리토모의 실권은 1185년부터 굳어졌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해는 1192년입니다.

가마쿠라 시대란 무엇인가요?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 최초의 봉건 군사 정권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사무라이의 등장과 일본의 봉건제 확립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즉 가마쿠라 막부는 1185년에 시작되었으며, 군사 정권의 행정 중심지가 현재 도쿄 남쪽 동안(東岸) 해안의 작은 마을인 가마쿠라로 옮겨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시대는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가 천황에 의해 쇼군(군사 지도자)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쇼군은 이제 자신의 가신들을 지방의 관리와 보호자로 임명할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막부는 사무라이의 행동 강령에 깊이 기반한 정치 형태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사무라이의 윤리 강령인 부시도(武士道)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라이는 이 정권의 수호자가 되어 민정, 군사, 보호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호조 씨의 지배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와 그의 아들들이 세상을 떠난 뒤, 미나모토 가문에는 쇼군의 자리를 물려받을 적임자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나모토 가의 미망인이자 호조 마사코는 한 아이를 입양해 쇼군으로 앉히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호조 씨는 수십 년에 걸쳐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1232년, 호조 야스토키는 51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사무라이 법전을 공포했습니다. 이 법은 고세이바이 시키모쿠(御成败式目)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최초의 봉건 법전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시기 일본은 경제적 성장과 인구 증가, 새로운 농업 기술의 도입을 바탕으로 한 차례 번영을 누렸습니다.
불교도 상당한 부흥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주요 불교 종파들 가운데 많은 분파가 가마쿠라 시대에 등장한 종단들의 후예입니다.

몽골과의 전쟁
가마쿠라 시대는 씨족 간의 다툼과 함께 다른 민족과의 충돌로도 특징지어졌습니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갈등 가운데 하나는 일본과 몽골 제국 사이의 충돌이었습니다.
1274년, 몽골 제국의 군주였던 쿠빌라이 칸은 일본을 정복해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일본은 금과 다른 자원이 풍부한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쿠빌라이는 약 4만에 가까운 병력을 하카타 만까지 보냈습니다.
사무라이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지만, 몽골군의 병력 차이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는 결국 패전했을까요? 실제로는 달랐습니다.
몽골군이 배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한밤중, 강력한 태풍이 몰아쳐 여러 척의 군함을 침몰시켰고, 그 바람에 몽골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은 몽골군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몽골은 일본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281년, 쿠빌라이 칸은 14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군대를 보냈고, 이 군대는 1차 때와 같은 하카타 해안의 같은 지점에 상륙했습니다.
두 달에 걸쳐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땅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했고, 다시 한 번 강력한 태풍이 규슈 연안을 강타해 몽골 함대를 후퇴시켰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신의 바람'이라는 뜻의 가미카제(神風)라 불린 태풍 덕분에,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두 차례나 막아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신들이 그 섬들을 보호한다는 믿음이 한층 강해졌습니다.
이처럼 인상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전사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방위 비용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결국 사무라이 계층은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고, 이는 막부 붕괴의 한 원인이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는 시기로 따지면 가마쿠라 시대가 끝난 뒤 도쿠가와(에도)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즉, 엄밀히 말하면 가마쿠라 막부의 사건이 아니라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출발점을 연 전투입니다. 다만 쇼군정이라는 제도 자체가 어떻게 다음 시기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다리이기 때문에 함께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해 쇼군으로 등극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 전투는 쇼군 마에다 도시에가 세상을 떠난 뒤 도쿠가와에 대한 대모(對모) 계획이きっかけ가 되었습니다.
이 모의의 중심에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동맹 세력과 함께 도쿠가와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무력 면에서 도쿠가와 군보다 우세했지만, 도쿠가와의 군사 전략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결국 패배했습니다.
도쿠가와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막부의 마지막 쇼군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도쿠가와 쇼군 시대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일본의 모습과 직결되는 시기로, 약 250년 동안 지속되며 일본 문화의 많은 부분을 남겼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천황과 쇼군
가마쿠라 시대 동안 재위한 천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순번 | 재위 기간 | 천황 | 한자 |
|---|---|---|---|
| 83대 | 1198년 ~ 1210년 | 다치미카도 천황 | 土御門天皇 |
| 84대 | 1210년 ~ 1221년 | 준토쿠 천황 | 順徳天皇 |
| 85대 | 1221년 | 추쿄 천황 | 仲恭天皇 |
| 86대 | 1221년 ~ 1232년 | 고호리카와 천황 | 後堀河天皇 |
| 87대 | 1232년 ~ 1242년 | 쇼조 천황 | 四条天皇 |
| 88대 | 1242년 ~ 1246년 | 고사가 천황 | 後嵯峨天皇 |
| 89대 | 1246년 ~ 1260년 | 고후카쿠사 천황 | 後深草天皇 |
| 90대 | 1260년 ~ 1274년 | 가메야마 천황 | 亀山天皇 |
| 91대 | 1274년 ~ 1287년 | 고우다 천황 | 後宇多天皇 |
| 92대 | 1287년 ~ 1298년 | 후시미 천황 | 伏見天皇 |
| 93대 | 1298년 ~ 1301년 | 고후시미 천황 | 後伏見天皇 |
| 94대 | 1301년 ~ 1308년 | 고니조 천황 | 後二条天皇 |
| 95대 | 1308년 ~ 1318년 | 하나조노 천황 | 花園天皇 |
| 96대 | 1318년 ~ 1336년 | 고다이고 천황 | 後醍醐天皇 |
가마쿠라 시대에 막부를 이끈 쇼군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순번 | 쇼군 | 재위 기간 |
|---|---|---|
| 1 | 미나모토 노 요리토모(1147–1199) | 1192년 ~ 1199년 |
| 2 | 미나모토 노 요리이에(1182–1204) | 1202년 ~ 1203년 |
| 3 | 미나모토 노 사네토모(1192–1219) | 1203년 ~ 1219년 |
| 4 | 구조 요리쓰네(1218–1256) | 1226년 ~ 1244년 |
| 5 | 구조 요리쓰구(1239–1256) | 1244년 ~ 1252년 |
| 6 | 무네타카 친왕(1242–1274) | 1252년 ~ 1266년 |
| 7 | 고레야스 친왕(1264–1326) | 1266년 ~ 1289년 |
| 8 | 히사아키 친왕(1276–1328) | 1289년 ~ 1308년 |
| 9 | 모리쿠니 친왕(1301–1333) | 1308년 ~ 1333년 |
가마쿠라 시대는 일본이 중앙집권에서 군사 중심의 봉건 사회로 전환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사무라이라는 존재가 공식적인 사회 계층으로 자리 잡고, 몽골의 침공이라는 외부 충격과 호조씨의 내정 운영이라는 내부 역학이 맞물리면서 약 150년 동안 지속된 첫 번째 막부의 성패가 갈렸습니다. 막부라는 제도의 장단점이 이 시기에 모두 드러났다고 볼 수 있죠.
여러분은 가마쿠라 시대의 어느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가요? 사무라이의 사회적 등장과 부시도의 형성, 몽골과의 전쟁, 아니면 호조씨의 정치적 운영? 다음에 다루었으면 하는 일본 시대가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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